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독립 전쟁 (문단 편집) ==== 1775년, 보스턴 공방전 ====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애국심과 총만 있던'''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조차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또한 군기도 개판이라 미국 독립군의 서열 2위였던 [[찰스 리]]의 경우엔 전쟁 중에 적진 근처의 술집에서 문란한 파티를 벌이다가 다음 날 아침 영국군 순찰병에게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미국 측은 미인계를 써서 영국군 장교를 납치한 후 맞교환하며 그를 구해낸다.] 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또한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애국심으로 강화된 수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 영국군이 [[피로스의 승리|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커서]] 수적열세를 더 악화시켰다.]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 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 말이 신사 협정이지, 실제로는 해상 철수 중에 공격하면 보스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